[송호근 칼럼] 민교협, 그리고 강정구 교수께
저는 오늘 '강정구 교수 건'에 대한 편지를 한 통
받았습니다.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민교협)의 성명서입니다. 갑자기 존칭을 쓰는 이유를 독자들께서 헤아려 주실 것으로 믿습니다.
강정구 교수'건'이라고 해서 화를 내지는 말아주십시오.
이것이 '사태'로 번지기를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민교협은 저도 회원으로 있는 단체이고, 칼날 같은 이성으로 시민권리와 자유의 신장을 위해
중대한 공헌을 했다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이번은 다릅니다.
민교협은 영국의 자유주의 사상가 존 스튜어트 밀의 이론에
기대어 강정구 교수의 발언이 '학문적 소신'임을 강조하고 여기에 가해지는 어떤 억압도 정당하지 않다고 변론합니다. "어떤 의견이 강제적으로
침묵될 경우 그 의견은 진실일 수 있다. … 이를 부정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무오류성을 가정하는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사실, 밀의 자유주의에 대한 해석은 그리 간단치 않습니다.
학문적 자유를 방패막이로 하려면 우선 객관성을 확보해야 합니다. 밀을 원군으로 내세우는 데에 바로 그 점을 고려해야 했습니다. 밀의 자유주의는
왕과 토지귀족의 권력을 견제하려는 부르주아의 이념적 무기였다는 사실. 그 인용구절이 들어 있는 '자유론'이 발표된 1860년대가 어떤
시대였습니까? 귀족이 아닌 중산층 출신의 총리, 글래드스턴의 개혁시대였습니다.
밀의 자유론은 부르주아 세계관이 묵살되는 것을 막고 자본의
전성시대를 여는 사상적 열쇠였습니다. 두루 아시다시피, 그것이 학문의 모양새를 갖췄다고 해도 사회적 발언은 항상 이데올로기적입니다. 저의
발언도, 강정구 교수의 발언도 따라서 이데올로기적입니다. 무엇엔가 봉사하는 것이지요. 이념적 혐의를 줄이는 유일한 방법은 양쪽을 같은 거리에서
보는 것입니다.
강 교수가 혐오하는 보수주의자들과 달리, 저는 남북한의
정당성 시비를 오늘날의 흥망으로 재단하지는 않습니다. 다 제쳐놓고 해방공간과 전쟁 당시로 돌아가 봅시다. 남북한 양쪽 다 엉망이었지요. '두
개의 한국'의 저자 오버도퍼의 말대로, 어느 날 갑자기 미국 정부의 지시로 젊은 장교 두 명(러스크 대령과 본스틸 중령)이 38도선을
그었습니다.
군정장관 하지 중장은 코리아가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스탈린은 마치 바둑돌 놓듯 한반도를 팽창주의의 전초기지로 생각했고 김일성을 적임자로 지목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통일전쟁'이고,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덜 죽었을 것이라고요? 천만에, 전쟁만이 유일한 해결책이었나요? 미국은 전쟁 가능성을 외교전술로 가끔 활용했던 이승만을
달래느라 애를 먹었지요. 스탈린은 김일성의 세 번째 전쟁요청을 왜 갑자기 승인했나요? 외세는 양쪽에 다 있었고, 그것이 신생국가의
운명이었습니다.
한.미동맹이 '자발적 노예주의'라면, 북.소, 북.중동맹은
'사대적 주체주의'였나요? 할 말이 끊이지 않는군요. 당시 국민의 77%가 사회주의를 원했다? 당시 많은 지식인이 사회주의에 호감을 가졌지요.
'향수'의 작가 정지용도 월북하다가 기총소사로 죽었다고
합니다. 그때, 정지용이 사회주의의 진짜 모습을 알았을까요? 카프(KAPF)의 대표적 시인인 임화도 월북했습니다. 그가 1953년 간첩죄로
처형당할 때 심정이 어땠을까요? 아마, 남에 두고 온 딸의 이름 '순이'를 불렀을 겁니다.
'역사 앞에서'의 저자 김성칠 교수는 전쟁 당시 서울대학교
역사교수였습니다. 역시 사회주의에 호감을 가졌지요. 그런데, 정릉에서 열렸던 인민대회에 나가 보고서야 비로소 북한 사회주의의 실체를
깨달았습니다.
강 교수가 인용한 미 군정의 설문조사는 사회주의가 신문물로
퍼졌던 시대, 그것을 접했던 사람이 비교적 많았던 서울에 국한된 것입니다. 남로당과 전평의 기지였으니까요. 혹시, 어떤 실없는 미국인이 전쟁
중에 전국 조사를 했다고 가정합시다. 결과가 어떻게 나왔을까요? 강대국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면서 북은 결국 고립되었고, 남은 강 교수 말대로
'비굴한 풍요' 속에 살고 있습니다.
한국사회의 기성 주류가 모두 일진회와 같았고 지금도
그러하다고요? 용기가 부럽군요. 그게 과거사 청산에 임하는 이 시대의 합의인 듯해서 우려스럽습니다.
저는 우리 조부께 왜 그리 궁상스럽게 살았느냐고 무덤
앞에서라도 따질 용기가 없습니다. 이것은 민교협이 비난하듯 '색깔몰이'가 아닙니다.
후세대가 선대의 역사를 바라볼 때 갖춰야 할 최소한의
예의에 관한 얘기입니다. '최소한의 예의가 없는 자유는 권리도 없다'는 것이 밀의 자유론의 핵심입니다.
위글은 중앙일보(10월 12일자)에 난 것을 퍼 온 것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