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대한민국☆/★광복 76년 나라바로잡기

노무현 정권 5년 - 김지하의 글에서

modory 2008. 10. 19. 09:59

김지하의 '촛불을 생각한다 '
김지하 시인이 촛불을 생각한다는 글을 썼다. 그 속에 촛불 시위와 
노무현 정권의 5년을 단편적으로 비판해놓았다. 일부를 보면 
촛불을 횃불로 바꾸려는 자들이 있었다. 
촛불은 옛 우리 할머니들처럼 간절한 소망을 조용히 뒷뜰에 맑은 물 
한 그릇 떠놓고 비는 것이요, 횃불은 '불현당(불켠당·明火賊)'이 
높이 쳐 들어 부잣집을 덮치면서 허공에 지글지글 타오르던 것이다. 
전혀 다르다.
  4월 29일 청계 광장에서 어린이, 청소년, 여성들이 가만히 촛불을 
  켰을 때 비웃음을 일삼던 정의의 홍길동이들이 6월 10일 전후로부터 
  끼어들기 시작해 6월 29일에는 완연히 촛불을 횃불로 바꾸어 버리려 했다.
  촛불은 후천개벽으로 가려는 길이지만 횃불은 정권 탈취를 위한 혁명에의 
  몸부림이다. 전혀 다르다.
   왜 이리 되었나?
   지난 5년 집권 뒤부터다.
   돈맛, 권력 맛을 본 뒤부터다.
   정치는 개떡으로 하면서 만판으로 저희끼리만 즐겼던 것이다.
   못 속인다.
   이제 다 드러난다.
   심지어 그들 가운데 어떤 놈은 공적인 문화예산 가운데서 상당 액수를 
   제 개인 빛 갚는다고 인 마이 포켓 한 놈도 있다고 들었다.
  나는 그들의 본질을 지난 5년 노 정권 당시에 똑똑히 알았다.
  더 이상 쓸 만한 자들은 하나도 없었다. 모조리 사기꾼이다. 
  한마디 말없이 다 보았다. 날치고 설치고 까불어 대는 자들의 속치마 
  속바지며 고쟁이 (요즘에도 그런 거 있나? 있다) 팬티 속까지 다 보아 
  버렸다. 
  털이 몇 개인지도 다 안다. 
  어느 날은 대구 갔다 와, 차 속에서 자신만만한 운동권 출신 고급 관료 둘이 
  대구에 좋은 골프장이 있어 골프 치러 갔다 온다고 뻔뻔하게 떠벌리는, 
  술로 홍조 띤 두 상판을 본 일도 있다. 그날은 공휴일도, 일요일도 토요일도 
  아니었다.
  마르크스 자본론은 아예 읽은 일도 없고 경제의 '경'자도 모르는 자들이 
  정권을 틀어쥐고 앉아 왔다 갔다 나라 경제를 몽땅 망쳤다.
김지하의 '촛불을 생각한다' 전문 보기☞

전문
  좌익에 묻는다  
  [김지하의 '촛불을 생각한다'] 당파(鐺把) <3> 2008-10-09 오전 7:51:25     
  촛불을 횃불로 바꾸려는 자들이 있었다. 촛불은 옛 우리 할머니들처럼 
  간절한 소망을 조용히 뒷뜰에 맑은 물 한 그릇 떠놓고 비는 것이요, 
  횃불은 '불현당(불켠당·明火賊)'이 높이 쳐 들어 부잣집을 덮치면서 
  허공에 지글지글 타오르던 것이다. 전혀 다르다.
  4월 29일 청계 광장에서 어린이, 청소년, 여성들이 가만히 촛불을 
  켰을 때 비웃음을 일삼던 정의의 홍길동이들이 6월 10일 전후로부터 
  끼어들기 시작해 6월 29일에는 완연히 촛불을 횃불로 바꾸어 버리려 했다.
  촛불은 후천개벽으로 가려는 길이지만 횃불은 정권 탈취를 위한 
  혁명에의 몸부림이다. 전혀 다르다.
  나는 그 무렵 두 분 어머니를 잃고 상중(喪中)이었다. 
  마치 분향소 제단의 촛불이었다.
  그때 문상을 한다고 몰려온 한 떼의 횃불이 있었다. 
  상가(喪家)에서 술을 마시고 춤추고 노래 부르는 것은 흔치는 않지만, 
  그 역시 우리에 옛 풍습 중의 하나다. 문제는 거기에 있는 게 아니라 
  그들이 흔들어 대는 시끄러운 횃불에 있었다.
  '우리가 시청 광장에서 문화 행동을 조직했다!'
    몹시 불쾌했다.
    <문화행동>을 <조직했다>?
    조직했다?
    문화를?
    그것도 문화 행동을?
    조직?
    그들은 모두 나와 수십 년을 호형호제하던 사이다. 나는 그들을 
    내내 아끼며 사랑했고 그들 역시 나를 형님처럼 따랐다.
  그러나 나는 그날 밤 그들에게 단 한 번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나의 미학에 위배되어서가 아니다. 그런 걸 욕 한마디로 끝난다.
  그러나 그들이 그 예쁘고 애리애리한 어린이, 청소년, 여성들, 쓸쓸한 
  외톨이 대중들의 소담한 촛불을 왜가리같이 악써대며 '씨팔!',
   '좇같이!', '죽여라!', '밟아라', '찢어 죽여라!', '때려 부셔라!'의 
   그 흉흉칙칙한 구정물 바다에 몰아넣고 횃불을 치켜 올렸다는 것, 
   그것을 또 자랑처럼 으쓱대며 떠벌리는 것.
  너무 추(醜)했다.
  '추의 미학'은 나의 대학 때 전공 분야다. '탁류의 횃불' 또한 그 무렵 
  내가 즐겨쓰던 민중 문학 클리셰의 하나다. 
  더욱이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 즉, '적대(敵對)와 증오(憎惡)에 
  가득 찬 낄낄대는 웃음'은 나의 풍자시 오적(五賊)의 시학적 근거의 
  한가지이기도 했다.
  요컨대 나의 업(業)이었다.
  그래서 눈을 주지 않은 것이다. 미워서가 아니다. 위선이 아니라, 
  나는 요즈음 어떤 미운 사람, 미운 마음도 지극히 모시건 차차차차 
  그 반대의 고운사람, 고운 마음으로 변하는 것을 체험으로 알고 
  있고 또 그것을 진리로 믿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결국은 다 해소되어 버릴 것이라 하더라도 
  혐오감이 가는 걸 어쩔 수가 없었다.
  문화 행동을 조직했다?
  그 뒤 며칠을 내내 기회 있을 때마다 조용히 생각해 봤다. 미움, 
  혐오감을 동반하지 않고 청명한 마음 하늘에 한 줄기 빛처럼 
  대답이 돌아왔다.
  '어리석다.'
    다시금 돌아왔다.
    '어리석다.'
    나의 책임이 없는 것 아니다. 안다.
    그러나 나는 그 길고 긴 독방(獨房) 이후 분명 '모심'과 '개벽'의 
    길을 가고 있다.
    그들은 나와 함께 가지 않는다. 욕까지 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그들은 막상 횃불이 아닌 촛불을 위장하고 있었던 것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간단히 말하라. 이용해 먹으려 했던 것이다.
  병법의 영역에서는 흔하다.
  그러나 문화에서는 여지없이 더러운 짓이다. 그런데 그들 자신의 
  말로도 '문화 행동을 조직했다'고 하지 않았는가!
  이때 '조직'은 '사기친다'는 뜻도 된다. 내가 그랬던가?
  또 며칠을 혼자 있는 시간에 생각하고 생각했다. 기억을 뒤집어 
  한 가지 한 가지 모두 다 드러내 따져 보았다.
  없다.
  사기 친 적 없다.
  다시 확인한다.
  없다.
  내가 그들 모두를 '까쇠(Csseur·까불고 까부수고 까발리는 마당쇠)'
  라고 명명한 것은 그 뒤부터다. '댓글 알바' 정도가 아니다. 
  까쇠의 역사는 장구하다.
  마타도어, 프락치, 사꾸라, 위장침입자….
  그들이 왜 이리 됐는가?
  왜 정정당당함을 잃었나?
  왜 불굴의 투혼을 잃었나?
  왜 푸른 하늘을 쳐다보고 크게 울음을 터트릴 줄을 잊어버렸나?
  왜 땅을 치며 통곡할 줄도 모르게 되었나? 
  왜 맨날 술집에서 떡이 되도록 취해 게걸대다가 서로 쌈박질이나 
  하는 잡배가 되어 그 예쁜 아이들, 그 서늘한 눈빛의 젊은 여성들의 
  뒤통수나 치는 사기꾼이 되어 버렸나?
  언제부터인가?
  예전엔 그렇게까지 추하진 않았는데?
  왜 이리 되었나?
  지난 5년 집권 뒤부터다.
  돈맛, 권력 맛을 본 뒤부터다.
  정치는 개떡으로 하면서 만판으로 저희끼리만 즐겼던 것이다.
  못 속인다.
  이제 다 드러난다.
  심지어 그들 가운데 어떤 놈은 공적인 문화예산 가운데서 상당 액수를 
  제 개인 빛 갚는다고 인 마이 포켓 한 놈도 있다고 들었다.
  저희 선배 김지하가 7년 독방살이로 미치광이가 되어 출옥 후 
  10여 차례나 정신 병원을 드나드는데도 무슨 보상이니 위문이니 
  관심은커녕 다 한 번 얼굴 내미는 놈도 없고 다 한 번 겉치레 
  인사 여쭈는 년도 못 봤다. 핑계는 있다.
  연쇄 분신자살 때 자살하지 말라고 조선일보에 성토문 썼다는 것. 
  생명 사상 전파해서 배신자라는 거다.
  이젠 저희들이 몽땅 '생명과 평화주의자'를 자처하는 주제에 말이다.
  언제 내가 저희들과 똑같은 극좌였던가? 
  내가 언제 조직에 들어간 적이 있던가? 
  내가 언제 정통 마르크스를 주장하거나 설파한 적이 있었던가?
  진보는 극좌가 아니다.
  더욱이 나 같은 몽양계 중도 진보는 극좌와는 거리가 멀다. 
  나는 스물세 살 때 이미 몽양 여운형 계로 사상 편성을 마쳤다. 
  저희들이 허상을 만든 것이다. 감옥 안에 앉아서도 저희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나는 똑똑히 알고 있었다.
  감옥에 간 나를 철두철미한 마르크스-레닌주의자, 불굴의 혁명 투사로
 만들어 그 비극적 명성으로 저희들 탈권 기획을 성사시키려 했고, 
 어떻게 해서든 나를 처형당하도록 만들어 국제적인 선전전에 이용해 
 먹으려고 했고, 저희 말을 안 듣자 배신자, 변절자로 몰아 
 모략중상을 상시화했다. 심지어 어떤 선배란 자는 술에 취해서 왈,
  '지하는 감옥에서 죽어 버렸어야 해!'
  이젠 웃음조차도 안 난다. 수십 년 세월을 그랬다.
  나는 그들의 본질을 지난 5년 노 정권 당시에 똑똑히 알았다.
  더 이상 쓸 만한 자들은 하나도 없었다. 모조리 사기꾼이다. 
  한마디 말없이 다 보았다. 날치고 설치고 까불어 대는 자들의 속치마 
  속바지며 고쟁이 (요즘에도 그런 거 있나? 있다) 팬티 속까지 
  다 보아 버렸다. 
  털이 몇 개인지도 다 안다. 
  어느 날은 대구 갔다 와, 차 속에서 자신만만한 운동권 출신 고급 
  관료 둘이 대구에 좋은 골프장이 있어 골프 치러 갔다 온다고 
  뻔뻔하게 떠벌리는, 술로 홍조 띤 두 상판을 본 일도 있다. 
  그날은 공휴일도, 일요일도 토요일도 아니었다.
마르크스 자본론은 아예 읽은 일도 없고 경제의 '경'자도 모르는 자들이 
정권을 틀어쥐고 앉아 왔다 갔다 나라 경제를 몽땅 망쳤다.
  무슨 할 말이 있는가?
엠비 정권을 만든 것은 다른 이 아닌 바로 그들이다. 
잘 하는 짓이지! 
한 스님은 왈.
 '엉터리 좌파 5년에 왼쪽으로 기우뚱, 깡통 우파 5년에 오른 쪽으로 
 기우뚱. 그 다음엔 발딱 일어나 자연히 원만한 중도가 오겠지요,
  뭘!' 하하하하하.
 국민은 이렇게 말한다. 아는가?
 그러니 그들 까쇠들에 관해 이리 말하는 게 당연하고 또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허허허허허.
 그래, 계속하자.
 어떤 친구가 날더러 '레닌을 엉터리 혁명가라고 몰아세우고 
 신경제 정책이 예쌔닌을 자살로 몰아넣었다고 마구 말하면 어떻게 
 하나? 걱정스럽네.'
  '대개벽이 오고 있어! 이산화탄소 하나에만 초점을 집중하려는 
  나팔은 비겁이야! 무관하다는 말이 아니라 그것만 아니고 
  더 근본적 변동이란 거야! 난 이제까지 그 공부했었었어!
  그런데 자네 말 고쳐!
  <몰아세우고>니 <마구 말하면> 따위는 나에게 적용 안 돼. 
  '학생 때 자네보다 훨씬 더 그쪽 많이 공부한 게 나야! 
  레닌 자신이나 관련 사적 열권 정도는 영어로 독파했으니 
  몰아 세웠다 할 수 없고 사회혁명당 당수 마프노의 비극까지도 
  잘 알고 있으니 그 절친한 친구 예쎄닌을 죽였다고 주장하는 
  역사적 인과 같은 것 다 꿰뚫었어. 레닌이 신경제 정책으로 
  농민 착취하고 농촌 박살내자 농업사회주의자 마프노가 
  쿠데타 음모하다가 실패, 외국으로 망명한 과정 다 아는데 
  마구 말한다고 말할 수 없지. 자네가 도리어 마구 말하고 있어.
  '자네 왜 요즘 그렇게 날카로운가?'
    '허허허. 개벽의 때가 가깝다고 했잖나!'
    '혁명 말이야?'
    '혁명이 아니야! 후천개벽이야! 나 앞으로 더 날카워질런지도 몰라! 
    그러나 이것!'
    '뭐 말이야?'
 '좌파들이 저희만 공격 대상이라고 생각하는 건 형편없는 오만이고 
 염치없는 자만심이야! 5년 동안 그 엉터리 짓하고 자빠지고 난 뒤 
 지금도 그 따위 맘뽀 안 고친다면 사람 취급도 못 받아!
  가만히 눈 감고 반성할 생각 안하고 마르크스-촛불이 다 뭐야? 
  딱지 덜 떨어진 인사들!'
  '걱정돼! 걱정돼!'
  '앞으로 한두 마디 외엔 그 애들 칠 시간도 없어! 미국과 북한이 
  머지 않아 대사관 교환할 판에 뭐가 어째?'
  '요즘 좌파는 신좌파야!'
  '뉴레프트가 어제 오늘 얘기야? 뉴라이트하고 똑같애! 
  장충동 가봐! 주물럭! 그 옆에 원조 주물럭! 그 옆에 원조원조 주물럭! 
  저 변두리 길가에 가 봐! 막걸리! 그 옆에 진짜 막걸리! 
  그 옆에 순진짜 막걸리! 그 옆에 순진짜 왕대포 막걸리! 
  그거 모두 한꺼번에 망하더라고!
  소용없어.
  한 놈 망하면 연쇄적으로 다 망하는 게 개량주의의 역사야! 
  그딴 것 갖고는 개벽세상 오는 거 못 당해! 정신 차려 이 사람아! 
  가까운 친구가 지금 무슨 소리하는 지 알아듣지도 못해? 
  아니 후천개벽 얘기할 때?'
  혁명이라니?
  아마도 오늘 이후엔 '좌파'니 '좌빠' 따위 더 입짓할 틈 없다. 
  새 공부하기 바쁘고 새 소식 전하기 바쁠 것이다. 
  그러나 소위 '좌빠'에 대해 한 네 가지 쯤은 원론적으로 정리해 
  두는 게 젊은 촛불들의 공부에 도움 되겠다.
첫째, 유물론은 더 이상 철학 구실 못한다. 인도 철학자 
사르카르(아난무르타)는 
  유물론처럼 오류투성이 과학은 더 없다고 개탄한다. 
  왜냐면 과학으로서의 유물론의 그 과학적 실증성의 근거는 감각인데, 
  감각처럼 잘못 판단하기 쉬운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 중에도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게 시각(視覺)인데, 시각조차도
'잘못 보기 쉽고', '꺼떡하면 둘로 셋으로 착시(錯視)하고!',
'빛, 공기, 기온, 그늘, 속도에 따라 똑같은 것이 전혀 달리 보이고?',
'망막에 이상이 있거나 망막 뒤의 내면에 탈이 생기면 금방 
눈의 지각력에 변동이 오고', '병이 들거나 초비상 사태에는 눈이 
넷이 된다고 말하는 정도로 해괴한 환각이 흔해 빠지는 것'이 
바로 눈이라는 것이다. 다른 감각은 여기에 비교도 안 된다. 
이런 감각으로부터 오는 데이터를 전적으로 신뢰해서 거기에 
실증의 토대를 두는 과학이 과연 엄밀한 과학인가?
  또한 맑시즘은 그 출생 때부터 과학을 앞세워서 인기를 얻었고 
지금도 그렇다. 그러나 과학이면 과학일수록 실험실 운명을 못 벗어난다. 
실험실이 무엇인가? 끊임없는 실험의 지속성 자체다. 
어제 진리였던 것도 오늘 아침 다른 발견을 하면 오늘 저녁엔 
이미 진리가 아니다. 덧없는 것이다. 
항구적 과학이란 이 세상에 없다. 있다면 그것은 과학의 미신뿐이다. 
맑시즘은 이제 이미 과학이 아니다. 
그것을 과학으로 신봉하는 것은 곧 미신일 뿐이다.
그것을 과학으로 신봉하는 것은 곧 미신일 뿐이다. 
로제-슈페리가 '아래로부터의 기제(mechanism from under)'는
 '위로부터의 기제(mechamism from upper)' 없이는 기제 
 그 자체로서 성립될 수 없다고 했다.
한때 우리나라 운동권에서 갈증에 물 한 모금처럼 떠받들던
 '루이 알튀세르'가 정신병을 거치면서 무엇이라 말했나?
  '착각도 사실이다.'
그는 결국 '유명론적 유물론(唯名論的 唯物論)'이라는 새로운 
과학 명제에로 돌아가고 만다. 유명론이야말로 '위로부터의 
기제의 고전 형태'다.
  둘째, 변증법은 더 이상 정확한 논리가 아니다. 생명 생성과 진화에 
  있어서도 변증법은 <외삽법(外揷法)>에 불과하다. 
  역시 좌빠인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아도르노는 일찍감치 헤겔과 
  마르크스의 '정반합(正反合)'의 변증법을 정면 비판하며
   '정반(正反)'의 부정(否定)의 변증법을 대안으로 제출한다.
    요컨대 '합(合)'이란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헤겔의 '정신현상학'의 목표인 세계사의 정상으로서의 
게르만 민족국가 성립도 마르크스의 혁명 열사의 목표인
 '독일이념(Deutsch Ideologie)'의 실현태로서의 스탈린 시대의 
 '소비에트 러시아'라는 것도 모두 다 '유토피아' 
 즉 '없는 곳'이니 말짱 허구요 망상이라는 말이 된다. 
 그리고 그것은 현실 역사에서 증명된다. 
 조선 공산국의 역사상 최고의 이론가로 널리 알려진 박일(朴一)은 
 북한에 가지 않고 알마티에서 내내 살다 죽었는데 죽기 전 
 대만 강연에서 다음의 말을 남겼다.
  '인류철학사에서 아직까지도 변증법을 넘어 설 논리는 나오지 
  않았다. 단 하나 예외가 있는데 역철학(易哲學)이다. 
  그러나 역은 현대화되어야만 변증법을 넘어서는 논리로 될 수가 있다.'
  덴마크의 저 유명한 양자 물리학자 닐스 보어의 태극 해석이 있다.
  '모든 반대되는 것은 상호 보완적이다.'
  영남의 수승한 동양학자 조동일(趙東一) 교수는 '상극(相剋)은 
상생(相生)이고 상생은 상극이다'란 명제를 앞세워 북경대학 초청강연에서
  '모택동의 모순론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상생과 상극의 태극을 
  앞세운 것은 맞았으나 상극 즉 모순의 투쟁성은 항구적이요 상생, 
즉 모순의 통일성은 잠정적이라는 규정은 틀렸다'라는 유명한 발언을 남겼다.
동학의 생성 논리 진화 철학은 '아니다-그렇다(不然其然)'이다. 
드러난 차원의 '이것과 저것' 사이의 '아니다-그렇다', 
그리고 숨은 차원이 드러난 차원으로 열렸을 때 그 새 차원과 옛 차원의 
생성 관계 역시 '아니다-그렇다'인 것이다.
  변증법과 같은 삼진법이 아니라 생성적 이진법이다.
  이것은 수운 최제우 이후 100년이 지나 미국의 저명한 생물학자요 
  정신과학자인 그레고리 베이트슨의 '정신과 자연'에서 그대로 반복된다.
  한국 전통의 경락학(經絡學)에서는 이것이 그대로 생명 과학의 
  핵심 명제로 드러난다. 경락에는 표층과 심층이 있어 상호 생성한다.
  표층의 '생극(生剋·相生相剋)'과 심층의 새로운 생극 관계가 
  표층으로 올라와 상호 연계되는 '복승(複勝)' 사이의 교차 생성의 
  원리가 또한 그것이다.
  불교의 중관론(中觀論) 유식학(有識學) 참선법(參禪法)에 토대를 
  둔 것으로 알려진 뇌과학(Cybernetics)과 그 실현인 
  컴퓨터의 '노-예스(no-yes), 예스-노(yes-no)' 또는 '온-오프(on-off), 
  오프-온(off-on)'이 또한 그것이다.
  그래서 다니엘 벨은 가라사대
  '컴퓨터에는 변증법이 없다'고 한 것이다.
  디지털 네트워킹 시대에도 변증법의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논리가 
  인간 행동을 전면적으로 자극할 수 있을 것인가? 
  유물론과 변증법이 사멸한 인간의 영적 생명 활동에서 과연 
  맑시즘은 무슨 불꽃을 참으로 피울 수 있을 것인가?
  셋째, 마르크스는 우선 자본주의가 고도의 생산력으로 전 세계를 
  전면적으로 변화시키고 있음에 긍정을 표하고 나서 그 위대한 변혁의 
  주동적인 생산을 직접 담당한 산업 프롤레타리아가 도리어 
  자기 주도권을 되찾아 진정한 주인이 되는 항구적인 공산주의 혁명을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수회 신부인 이브 깔베는 이에 맞서 그의 '마르크스에 대한 
  빵쎄'에서 '프롤레타리아 일회성(一回性)' 이론을 제기한다.
  산업 프롤레타리아가 세계 혁명의 주체로서의 도덕성을 유지하는
   것은 그가 노동 노예인 시점에 한정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주장하듯이 산업 프롤레타리아는 세계 변혁의 실질적 
   주체임에도 로마 시대와 똑같은 한낱 자식 생산자에 불과한 소외된 
   삶을 사는 지옥에 있음으로서 혁명 주체로서의 도덕성과 정당성을 
   함께 가졌다는 것은 허구라는 것이다. 
 그 불행한 소외 상태의 노동 노예인 한 그의 혁명 주체로서의 도덕성, 
 정당성이 유지되지만, 탈권하여 권력을 장악하거나 노조 합법화로 
 높은 임금을 보장 받을 때는 권력이나 화폐에 의해 바로 그 도덕성, 
 정당성은 쉽게 부패해 버린다는 것이다. 
 따라서 소외 상태에서만 일회적인 것이 바로 그 혁명열이고, 
 결코 그것은 항구적인 정열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하 중략
 '쪼각쪼각 흩날리고 흩날림이여.
  붉은 꽃잎들의 그 붉음이로다.'
  (片片飛飛兮 紅花之紅耶)
 김지하/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