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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칼럼에서 - 부자 드라마

modory 2010. 3. 12. 09:15


◈문화평론가 최영일의 칼럼- 부를 좇는 드라마의 탄생과 배경 ◈

 

2010-03-11

KBS 드라마 '거상' '명가' '부자의 탄생' …


2010년 초두부터 '부자'를 표방한 드라마가 줄을 잇고 있다.

1월 시작돼 16부작으로 막을 내린 '명가', 3월 초 앞서거니 뒤서거니

시작한 '부자의 탄생'과 '거상 김만덕'이 그것들이다.



  KBS 드라마 최신작 '부자의 탄생'. 한동안 드라마가 부자의 겉모습에 대해서만 다뤘다면 점차 부자의 이면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사진제공=KBS


'명가'는 실제로 12대를 이어온 경주 최 부잣집을 모델로 해 차인표가 최국선 역을 맡았고, '부자의 탄생'은 픽션이지만 '무늬만 재벌과 '생계형 재벌'이라는 대립적 설정으로 재벌 2세 남녀의 사랑과 야망을 지현우, 이보영을 중심축으로 그려 나가고 있다. '거상 김만덕'에서는 오랜만에 TV 나들이를 하는 이미연이 정조 시대 실존했던 한국형 여성 CEO의 선조격인 김만덕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연기한다. KBS가 앞장서 한국형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표방하는 일련의 부자 드라마를 보다보니 10여 년 전 비슷했던 문화 콘텐츠 물결이 오버랩 된다. ▶ 부자 드라마의 범람에는 이유가 있다 1997년 우리나라를 강타한 국제통화위기(IMF)의 여파가 짙게 남은 채 21세기를 맞던 그때, 최인호 작가의 장편 소설 '상도'가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이 소설은 역시 실존했던 의주상인 임상옥을 주인공으로 하여 현대와 근대를 오가는 이야기 속에서 홍경래의 난을 배경으로 추사 김정희와 우정을 쌓으며 고난의 시대를 살아가는 상인의 교훈을 전 국민에게 각인시켰다. 그것은 '재물은 공평하기가 물과 같고, 사람은 바르기가 저울과 같다'는 임상옥의 좌우명으로 요약된다. 이 소설은 이재룡을 주연으로 하여 2001년 MBC에서 드라마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전국적 '부자열풍'이 한국인의 가치관을 뒤바꾸었다. '부자아빠 가난한 아빠'라는 책이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모 카드사의 광고에서 여배우 김정은이 '여러분, 여러분, 부자 되세요!'라고 외치며 전 국민의 호응을 얻었다. 소설 상도와 드라마 상도, 부자와 가난한 두 유형의 아빠를 대비시킨 처세서, 그리고 부자 되라는 단순명료한 광고카피는 지난 10년 간 우리 사회의 무엇을 변화시켰을까? 그것은 전통적 가치관의 변화였다. 조선시대부터 우리에게 뿌리 깊이 박혀있던 사상 중 하나는 '사농공상 士農工商의 서열문화다. 여기에 따르면 상업에 종사하는 상인은 가장 천대받는 직업에 속한다. 학문이나 관직에 종사하는 선비 우대정신은 '청빈'을 미덕으로 강조했다. 지배층은 깨끗한 가난, 맑은 가난을 고상한 것으로 여기도록 백성을 계도한 것이다. 그래서 누구나 물질적으로 풍요롭기를 바라면서도 '부'에 대한 노골적 지향을 속 깊이 감춰야했던 것이 현대까지 이어져온 관습적 태도였다. 이런 전통은 다음과 같은 말도 유포시켰다. "가난은 죄가 아니다. 다만 불편할 뿐이지."



조선 정조시대를 배경으로 어려운 사람을 도운 기녀 출신 거상 김만덕의 일대기를 그린 KBS 드라마 ‘거상 김만덕’(스포츠동아 양회성)



▶ 부자에 대한 인식을 뒤바꾼 IMF


그런데 21세기가 열리자마자 '상도', '부자아빠 가난한 아빠', '부자 되세요'의 상승 시너지는 물질적 부에 대한 노골적 욕망을 단숨에 분출시키며 가치관의 변화를 일으켰다. 실물경제에서 코스닥 열풍, 재테크 열풍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도 바로 이때다.

그 결과 '가난은 죄가 아닌 것'이 아니라 가난한 아빠는 자식들에게 크나큰 죄를 짓는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무한경쟁사회에서 자녀가 출세하도록 강력한 물적 토대를 제공하지 못하는 것이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부모의 죄악이 된 것이다.

그로부터 10년 뒤 최근 '부자' 드라마의 물결에서는 변화의
트렌드를 읽을 수 있다. 우선은 사회적 관심의 우선순위 변동이다. 드라마 분야에서 사극의 시청률이 높은 이유는 우리나라 시청자들이 '권력투쟁'을 흥미로워하기 때문이다.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권력구도의 갈등과 궁중 암투가 재미있는 것이다.

사극엔 충성과 배신의 게임과 포섭과 배제의 전략이 담겨 있다. 이승만 정권을 그린 '제 1공화국'을 비롯해 '제 5공화국'에 이르기까지 현대사의 정치드라마도 제작, 방영이 될 때면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다. 그런데 이제 '정치의 시대'는 '경제의 시대'로 바뀌고 있다. 이미 지난 대선에서 국민의 과반수는 '경제대통령'을 선출했다.

'권력'의 추구는 '부'의 추구로 급격히 바뀌었다. 똑똑한 자녀를 법대에 보내 관료를 만들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이제는 MBA에 보내 CEO로 만드는 것이 더 나은 발상으로 거론된다. 권력은 무상하지만 재물은 오래 간다는 자각을 했고, 나아가 권력 또한 부의 기반에서 창출된다는 일반적 사고가 탄력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연작 시리즈처럼 이어지는 부자 드라마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10년 전처럼 단순히 '부자 되세요'가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도덕적인 부의 형성과정을 강조하고, 축적된 부를 '가진 자의 사회적 책임'으로 나눔을 실천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이 또한 '미소금융' 사업추진이나 대기업과 지도층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최근의 흐름과 맥락을 같이 한다.



IMF이후 가난함은 불편함을 넘어 '죄'에 가깝다는 생각이 퍼졌다. 결국 모두가 부자가 되기 위해 뛰고 있다(로이터)



▶ 부자들의 이상적 탈출구 '노블레스 오블리주'

세계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이 같은 상징으로 중세 이탈리아의 메디치 가문이 거론된다. 막대한 부를 소유한 이 가문은 당시 왕들과 교황에게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며 문화예술을 육성했다. 산업혁명 이후 근대에는 유럽을 중심으로 '오뜨 피낭스(세계금융)'가 형성되는 핵심에 로스차일드 가문이 존재한다.

20세기 초 사회공동체가 '시장화'되는 역사적 과정을 비판한 학자 칼 폴라니마저 로스차일드 가문의 존재가치를 인정한 바 있다. 이런 사례들만 해도 고도 자본주의 시대가 아니어서 시장사회보다는 공동체사회의 분위기가 강했고, 부자가 약자를 돕고 보호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중요한 덕목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1차와 2차 세계대전을 치르며 세계적 부의 중심축이 미국으로 넘어간 이후 공동체적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훨씬 시장 중심적으로 바뀌게 된다. 미국 스타일의 부자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 방식은 사회공헌마저도 시장주의 색채를 띠고 합리적 투자기법을 NGO 시스템에 도입했다. 그 결과 개인윤리와 사회시스템의 연결은 느슨해지고 분리된다.

미국 드라마 중 미국의 부자를 그린 기념비적 작품으로 '달라스'가 있다. 1978년 방영을 시작하여 1991년 종영하기까지 13년 간 두 시즌을 이어가며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바 있다. '달라스'의 이야기는 석유재벌 유잉 가문이 대를 이어가며 독선과 퇴폐로 허물어져가는 과정을 그려냈다.

드라마는 트렌드를 담는다. 하지만 때론 드라마가 새로운 사회 트렌드를 만드는데 기여하기도 한다. '명가', '부자의 탄생', '거상 김만덕', 2010년 일련의 부자 시리즈로 기록될 이 드라마 작품들은 우리시대의 어떤 트렌드를 담아내고, 또 어떤 트렌드를 창출할까?

종방한 '명가'는 재물보다 사람을 중시해야 한다는 사상과 신뢰에 대한 강조로 출발하여 청빈과 대비될 수 있는 '청부(깨끗한 부)'의 사례를 제시하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최 부잣집은 대대로 '흉년에는 재산을 늘리지 말라'는 철학을 실천하고 '사방 백리까지 굶어죽는 사람이 없도록 하라'는 원칙을 지녀왔다고 한다.

한편 '부자의 탄생'에서 주인공 최석봉(지현우 분)은 '부자들은 손동작, 몸동작이 다릅니다'고 말하며 '부자가 되려면 부자를 따라하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이 드라마는 실물경제에 적용될 재테크 기법도 다양하게 소개할 것이라고 예고하고 있으며 대형은행이 제작지원을 하고 있기도 하다.



드라마 '쩐의 전쟁'은 대중들의 달라진 돈에 대한 관념을 명확하게 보여준 수작이었다.



2007년 방영된 박신양의 '쩐의 전쟁'이 대부업을 배경으로 했고, 제작투자도 제2금융권 저축은행이 지원했던 것을 떠올리면 '부자의 탄생'은 '쩐의 전쟁'의 업그레이드 버전이라고 할만하다.

'거상 김만덕'에 대한 기대는 더 크다. 상인을 차별했을 뿐 아니라 여성의 사회활동이 극히 제한되었던 유교사회 조선, 그것도 척박한 제주도에서 기생출신으로 객주를 하며 해상무역으로 부를 일으킨 여인 김만덕의 이야기다.

그녀는 제주도에 대기근이 들어 주민들이 위기에 처했을 때 자신의 재산을 털어 제주도를 먹여 살린다. 나랏님도 못하는 일을 해내 당시 정조대왕의 높은 치하와 함께 여성최고의 벼슬을 받았을 뿐 아니라 사대부들의 칭송을 들었다.

▶ 부자가 된 이후에는 어떻게 하나? 새로운 문제제기

이제 단순히 '부자가 되라'는 메시지는 의미가 없어졌다. 이미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대중의 숨김없는 욕망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어떤 부자가 될 것인가?', '어떤 과정을 통해 깨끗한 부자가 될 수 있는가?', '부를 어떻게 가치 있게 쓸 것인가?'를 묻는 쪽으로 우리 사회의 관심사가 옮아가고 있다. 이들 드라마가 그러한 과제를 풀어내는데 기여하기를 기대해본다.

만약 이들 드라마가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고 표면적 치장으로만 그친다면 다시 10년을 기다려야 한국형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문화적 모델링이 시작될지 모른다.

자본주의 시장사회의 꽃으로 불리는 '마케팅'의 살아있는 역사인 석학 필립 코틀러는 궁극의 마케팅은 'CSR'이라고 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의 약어로 코틀러의 주장에 따르면 '착한 기업만이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착한 부자들이 판치는 세상'을 보고 싶다. 아, 나도 돈 많이 벌고 싶다. 그런데 '나'는 과연 착한가?

최영일 /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