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풍진세상●/★뉴스모자이크

[스크랩] 강우방과 유홍준

modory 2011. 6. 12. 14:11


◆ 미술사학자 강우방◆
조선일보 인터뷰

2011.06.12 일자 조선일보 [Why] [한현우의 커튼 콜] 고구려 벽화에서 한국미술 원류 찾아낸 미술사학자 강우방씨 인터뷰 기사가 났다. 그 기사 중에 눈길을 끄는 것이 문화재청장을 지낸 유홍준씨는 미술사학가 아니라 답사가 라는 것이다. 그런 그가 노무현 정권때 문화재청장을 하며 박정희 대통령이 쓴 광화문 현판을 폄훼했다.

 

동·서양 古미술의 비밀을 푼다… "난 칠순의 문화 혁명가"
32년간 박물관 지키다 퇴임 후 대학으로…
동서양작품 2000점 분석…새싹 모양 무늬 발견
고대 조형예술을 해석할 수 있는 열쇠 문양학 개척
"학계 비판 심하게 한다고? 난 얌전한 사람… 불의를 못참을 뿐"

지난 주말 일향(一鄕) 강우방(姜友邦) 선생의 책 두 권을 동틀 때까지 읽었다. 한 권은 1993년 펴낸 '미(美)의 순례'였고 나머지는 2007년 출판된 '어느 미술사가의 편지'였다. 둘 다 에세이였지만 고(古)미술 문외한(門外漢)에겐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한국 미술에 대한 선생의 애정과 탐구욕에 경탄해 한 장(章)만 더, 한 장만 더 하다가 모조리 읽어버렸다. 특유의 직설화법으로 세태와 시정(市井)을 일갈할 땐 그 통쾌무쌍함에 속이 후련했다.

특히 고미술 작품들에서 새싹 모양 무늬를 발견하고 이것을 토대로 동·서양 미술의 비밀을 풀 열쇠를 찾는 대목에서는 추리소설을 읽는 듯 긴박하고 진진했다. 신라 불교미술을 우리 미술의 뿌리로 봤던 자신의 오랜 견해를 미련없이 버리고 고구려 미술에서 새로운 맥을 대려는 시도는 자기혁신의 전범을 보는 듯해 감동적이었다.

미술 서적으로 가득 찬 연구소에서 강우방 선생이 ‘동·서양 고미술의 비밀을 풀 수 있는 해법’에 대해 설명했다. 수십년 고미술을 연구해 온 학자의 이론을 단번에 이해하거나 수긍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새로운 것을 알아낸 기쁨과 그것을 알리고 싶어하는 표정만큼은 쉽사리 읽을 수 있었다. 일흔살이 된 학자는 자신의 이론을 설명하며 줄곧 싱글벙글했다. / 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
국립경주박물관장을 지낸 이 노(老) 미술사가에게 매료된 것은 그의 '오유(傲遊)' 때문이었다. 그는 '오유'를 "분명 오만한데 전혀 밉게 보이지 않는 태도"라며 "헤프게 덕담이나 하고 가식적 겸손보다는 오유를 택하겠다…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의 기개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썼다.

'인문학의 위기'라는데 정작 이 분야 최고의 학자들은 뭘 하고 있는지 찾던 끝에 주변에서 강 선생을 추천 받았다. 올해 고희(古稀)를 맞은 강 선생은 지난 2004년 이화여대 후문 근처에 연구실을 마련하고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이란 이름을 붙였다. 그의 아호이기도 한 '일향'은 성덕대왕신종(속칭 에밀레종)에 새겨진 글귀 중 '고구려 백제 신라가 한 마을(一鄕)이 되었네'라고 삼국통일을 칭송한 것에서 따왔다. 그는 이곳에서 매주 강좌를 열어 미술사를 가르치는 한편, 고미술 작품의 본을 떠서 단계적으로 색칠해가며 그 무늬를 파악하는 '채색분석'을 하고 있다. 동·서양을 통틀어 작품 2000여점의 분석을 마쳤으니, 이제 차례로 논문을 발표하는 일만 남겨두고 있다고 했다. 지난 7일 낮 일향연구원을 찾았 때, 강 원장은 용 7마리가 새겨진 낙랑시대 황금버클 사진을 모니터에 띄워놓고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말 그대로 안광(眼光)이 모니터의 뒤(背)를 뚫으려는(徹) 형국이었다.

세계미술의 비밀, 내 손안에 있다

―지난 주말에 '미의 순례'와 '어느 미술사가의 편지'를 읽었습니다.

"아, 그 쉬운 책?"

―워낙 과문(寡聞)해서 어려웠습니다. 모르는 단어도 많고.

"그게 우리나라 교육의 문제예요. 중요한 것은 교과서에서 소개해줘야 하는데…. 책 중에 제일 안 좋은 책이 초·중·고 교과서예요. 전부 나열식이고 학생들로 하여금 문제의식을 갖게 하지 않아요. 그냥 좔좔좔 외우게 해놨으니."

졸지에 후진 교육의 산 증인이 돼버린 것은, 그에게 책에 나오는 '공포(栱包·처마 끝의 무게를 받치는 나무쪽)'가 무엇인지 물었기 때문이었다.

―저의 잘못만은 아니군요.

"(힐끔 쳐다보고) 잘못일 수도 있죠. 하하하. 모두의 책임이에요. 바로 그 공포에 동양 사상이 응축돼 있어요. 그 공포의 비밀을 제가 풀었거든요."

―공포뿐 아니라 동·서양 미술의 큰 비밀을 풀었다면서요.

"이화대학 와서 고구려 고분벽화 연구를 시작했어요. 학계에서 벽화의 20%가량만 해석이 된 상태였죠. 그 나머지 80%를 제가 풀었어요. 그간 몰랐던 우리나라 미술의 80%를 알게 된 거죠. 지금 미술사학계 기성세대들은 초긴장 상태예요. 그간 연구하고 배워왔던 게 다 엉터리란 게 드러났으니까. 모두 '채색분석법'이란 것으로 밝혀낸 거예요."

호박넝쿨에서 솟아난 영기(靈氣)의 싹. 고미술에서 자주 발견되는 무늬와 비슷하다. / 강우방 원장 제공

1968년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로 박물관에 입문해 2000년 경주박물관장을 끝으로 32년간 박물관을 지켰던 그는 퇴임 후 이화여대 초빙교수로 일하면서 '영기문(靈氣文)'을 발견(?)했다고 했다. 나비 더듬이 같기도 하고 고사리 싹 같기도 한 무늬를 고미술품에서 똑같이 찾아내고, 이것이 성장·변형돼 연꽃이 되는 형상을 찾아낸 그는 이 무늬를 '우주에 충만한 신령스러운 기운'이라는 뜻으로 '영기문'이라 이름붙였다. 이 무늬가 동·서양 고미술에 공통적으로 쓰였기에 영기문 연구가 고대 조형예술을 해석할 수 있는 열쇠라고 보았다. 이를 토대로 문양학(文樣學)이란 학문을 개척 중이며 영기학파(靈氣學派)를 만들고 있다. 그는 책에서 "퇴임하고 대학교로 온 해인 2000년까지는 전생(前生)이고 그 이후로는 금생(今生)"이라고 썼다.

―'영기학파'는 어떤 사람들로 구성됩니까.

"기존 세대 학자들은 없어요. 젊고 뛰어난 사람들이 뭉치고 있어요. 이제 미술사를 하려면 미술사학과에 가면 안 돼요. 가면 오류만 배우거든요."

―미술사 공부하려면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저한테 와야죠. 하하하. 대중이 참 무서운 거예요. '나는 가수다'에서도 대중이 가수를 뽑잖아요. 제 이론을 학계에서는 모른 척하지만 대중들은 금방 받아들여요. 나쁜 게 없고 틀린 게 없으니까."

―영기문을 처음 발견한 것은 언제입니까.

“2002년쯤이에요. 고구려 벽화를 제 손으로 그려보다가 생명의 싹을 발견한 거죠. 자연에도 영기문이 있어요. 대표적인 게 고사리 싹이에요. 모든 생명은 최초의 형태가 돌돌 말려진 모양이죠. 아기도 엄마 뱃속에서 둥그렇게 웅크리고 있잖아요. 그 싹이 점차 자라나서 연꽃이 되고 생명이 되는 것을 색깔로 보여주는 ‘채색분석법’을 2006년에 개발했어요.”

강 원장이 맨 넥타이에도 그가 말한 무늬가 있었다. 그가 반색하며 말했다. “맞아요. 이게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 사온 거예요. 서양에도 이 무늬가 널리 퍼져 있다는 거죠. 이 무늬를 왜 쓰느냐. 아름답기 때문이죠. 이 무늬가 이슬람 모스크에 특히 많아요. 그런데 이 무늬가 뭘 뜻하는지는 아무도 몰라요. 세계에서 오직 저만이 이 무늬를 설명할 수 있죠.”

그는 이미 “나만 알고 있다” “나만 할 수 있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 이런 화법은 듣는 사람에게 반사적으로 의구(疑懼)와 경계(警戒)를 불러일으켰다. 그의 이력이나 평판에 대해 몰랐다면 이쯤에서 인터뷰를 중단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간 읽고 듣기로, 그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한국 미술사학의 최고봉’이라고 불리는 강 원장은 애써 겸손하려 하지 않았다. 그것이 바로 그가 말한 ‘오유’였다. 중앙박물관장 공모에서 두 번 떨어지고 재야(在野)를 고집하는 그는 현재 박물관과 학계를 비판하는 데도 전혀 거침없었다.

―얼마 전 발간된 고(故) 한병삼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추모집에 “박물관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생각나는 분”이라고 썼습니다. 박물관의 위기란 어떤 것입니까.

“이를테면 중앙박물관이 용산으로 이전할 때 큰 위기였죠. 건축설계부터 가장 문제가 많은 게 당선됐어요. 크기만 하고 아주 창피해요. 그때 박물관장하고 많이 싸웠어요. 사람을 키워야 하는데 집만 키우니까. 지금은 사람이 없어요.”

―숭례문 단청(丹靑) 문제를 제기한 것도 그런 배경이 있습니까.

“단청을 공부하는 사람이 있다지만 단청을 몰라요. 단청 전통 기법은 전수가 안 돼 맥이 끊겼어요. 그만큼 나라가 썩은 거예요.”

강 원장은 위작(僞作)도 꾸준히 지적해왔다. 근년 들어 강 원장이 ‘위작 판정’을 한 것은 추사(秋史)가 초의선사에게 써줬다는 ‘명선(茗禪)’이란 글씨였다. 정민 한양대 교수는 최근 저서 ‘새로 쓰는 조선의 차 문화’에서 꼼꼼한 고증을 통해 이 글씨가 진품이라고 주장했다. 두 사람은 지금 진검승부를 벌이고 있다.

―정민 교수의 주장을 읽어봤습니까.

“아 그거, 정민 교수는 한문을 잘하고 재주는 좋은데 글씨를 모르는 사람이죠. 그 주장을 읽어보니까 너무 한심해서…이걸 대응을 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그러고 있어요.”

―안목이 없어도 문헌이나 논리로 고증할 수도 있잖습니까.

“작품이 가장 중요한 것이고 작품에 대한 이해가 먼저예요. 작품을 보면 진품이 아닌 걸 알 수 있거든요.”

강 원장은 용 7마리가 새겨진 낙랑시대 황금 버클 사진을 모니터에 띄웠다. 이 복잡한 무늬의 버클도 ‘채색분석법’으로 파헤칠 예정이다. / 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

―원래 성격이 다혈질입니까.

“아유, 저는 조용한 사람이죠.”

―글에서도 혈기가 넘쳐나던데요.

“하하하. 제가 원래 얌전한 사람인데, 불의는 못 참아요.”

―박물관장을 못한 데에 그런 성격이 일조했습니까.

“그건 김대중 정권 때 모든 요직을 특정학교 출신이 차지하면서 그렇게 된 거예요. 아, 박물관장 얘기는 그만 하고 제 독창적인 이론에 대해 써주세요.”


―많은 이들이 박물관장을 했어야 하는 분이라고 말하니까….

“그렇죠. 그때는 다 관장 자리 도둑맞았다고 했어요. 나는 박물관을 대표하는 학자였고. 누구도 나와는 상대가 안 되는 거죠.” 당시 강 원장은 정년을 1년 앞두고 명예퇴직을 신청, 경주박물관장을 퇴임했다. 그는 “당시 정부에서 주겠다던 훈장도 거절했다”고 말했다.

미술에서 진리를 찾는 것이 미술사학

―“미술사학이 인문학의 꽃”이라는 게 무슨 뜻입니까.

“미술이 중요한 건 고대의 사상이 반영돼 있기 때문이에요. 노자·장자 사상을 반영해서 그림으로 조형화한 게 고대 미술의 무늬들이에요. 그런데 미술사를 한다는 사람들이 사상 공부를 안 하니까 이걸 못 보는 거예요. 미술에서 종교나 사상의 원형을 찾을 수 있어요. 글자로 된 문화재는 해석에 한계가 있어요. 그러나 조형화된 건 조형적으로 진리를 표현한 것입니다. 그걸 읽어내서 문자에는 없는 진리를 도출해내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미술사학이 인문학의 꽃이라는 거예요.”

―그 학문이 정말 재미있습니까.

“아유, 잠이 안 올 정도예요. 막 가슴이 설레고. 인류가 수천년간 몰랐던 걸 알게 되니까 시간도 아깝고 잠도 안 오죠. 어떤 때는 연구실에서 혼자 막 소리 지르고 환호하고 그래요. 그런 기쁨을 많은 사람들과 함께 누리고 싶어요.”

강 원장은 거침없는 실명(實名) 비판으로도 유명하다. 그 대상 중 한 명이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명지대 교수)이다. 강 원장은 특히 유 전 청장의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을 집중 비판해왔다. 유 전 청장의 저서에 실린 작품들에 대해 “절반이 위작”이라고 비판하며 “아는 만큼 보인다는 사람이 저서에 위작을 그렇게 많이 실은 걸 보면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맞는 말일 수도 있겠다”고 조소하기도 했다.

―아는 만큼 보이는 게 맞는 것 아닙니까.

“그게 유홍준이가 만든 말인데, 그 친구가 말하는 ‘안다’는 건 역사적 사실, 에피소드, 스토리를 뜻하는 거예요. 그렇게 아는 게 아니라 안목을 갖고 작품을 관찰하고 사상과의 관계를 아는 ‘인식’의 문제가 핵심이에요.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인식이 없이 지식만으로 안다고 하면 위험해요.”

―학문하는 사람에겐 그렇겠지만 보통 사람에겐 괜찮은 문화재 감상법 아닙니까.

“역사적 사실뿐 아니라 유적의 본질에 대해서도 말해줘야죠. 본질은 없고 쓸데없는 것만 말해주니까 그렇죠. 유홍준이는 그래서 미술사가가 아니라 답사가(踏査家)예요.”

―대중적으로는 유 교수가 선생보다 더 인기 있잖습니까.

“아, 그럼요.”

―아까 “대중은 무서운 존재”라고 했습니다만.

“팬들의 질이 문제예요. 거긴 전부 아줌마 부대예요. 팬들도 수준 차이가 있어요.”

―유 교수와는 사이가 안 좋은가요.

“그렇지 않아요. 제가 아끼는 마음에서 그러는 거예요. 공부하면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을 텐데 연구는 안 하고 대중적인 얕은 글만 쓰잖아요. 그러니까 아까운 거고 질책하는 거지. 그 친구 내가 미워서 그러나요.”


―학생을 잘못 가르치고 엉터리 논문 써내는 대학교수들도 비판해왔지요.

“교수 평가할 때 논문 편수로 평가해요. 어떤 교수는 1년에 10편도 넘게 논문을 써요. 좋은 논문은 5년, 10년도 걸리거든요. 그런데 편수만 세니까 다 짜깁기하고 조작하고. 인문학은 조작을 많이 해요. 결론이 안 나오면 조작하는 거죠. 자연과학은 결론 조작하면 벌 받잖아요. 인문학은 안 그래요. 그러니까 인문학이 대접을 못 받아요. 교수가 공부 열심히 해서 5년 만에 좋은 논문 하나 내놓으면 대학에서 쫓겨나요. 그런 놈의 나라가 어디 있어요.”

―한국 대학의 총체적인 문제가 무엇이라고 봅니까.

“가장 큰 문제가 파벌이에요. 교수들끼리 파벌 만들어서 싸우고, 학생들은 자기 선생 글만 인용해요. 두 번째는 토론이 없어요. 교수는 항상 공부해야 하는데 다 한 자리 차지하려고 딴 데 가서 놀지 연구실엔 없어요.”

고려 수월관음도의 일부를 본떠 채색분석한 모습. 영기문이 변화·발전해 연꽃이 되는 과정을 분석했다. / 강우방 원장 제공
강 원장은 학계를 비판할 때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서울대 독문학과를 졸업한 뒤 고고인류학과에 편입해 1학기 만에 중퇴한 그는 ‘한국 고고학의 창시자’로 불리는 고(故) 김원룡 서울대 고고인류학과 교수에 대해서도 서슬 퍼렇게 비판했다. “발굴단을 구성해 1년은 했어야 할 무령왕릉 발굴을 폭우 속에서 하룻밤에 끝냈고, 개인의 영달을 위해 그랬기 때문”이라는 이유였다.

그런 강 원장이 실명으로 칭찬하는 학자도 있다. 2005년 49세 나이로 작고한 미술사학자 오주석이다. 강 원장은 “오주석은 그림도 알고 한문도 알고 역사도 안 몇 안 되는 미술사학자였다”며 “살아있었다면 지금쯤 참 좋은 글을 많이 남겼을 텐데 정말 아까운 사람”이라고 했다.

“사실 아직 아무것도 모른다”

―오유(傲遊)란 말은 원래 있는 말입니까.

“고전에 있는 말이죠. 제가 엄청난 이론을 정립했으니까 자신 있고 당당하다, 그런 뜻이지요. 오유는 ‘오만’과 달리 좋은 말이에요. 세계미술에 얽힌 수천년 비밀을 제가 풀었으니 오유할 만하잖아요. 하하하.”

―한때 화가가 꿈이었다던데요.

“그랬죠. 그런데 그림에 대한 회의가 들 때쯤 우리나라 도자기와 석굴암을 보면서 이쪽으로 온 거죠. 그런데 결국 그림에 대한 꿈이 지금 제가 하는 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어요. 고미술 본을 떠서 직접 채색하잖아요.”

강 원장의 딸(강소연)도 미술사를 공부하고 현재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강 원장의 작은형은 강범석 전 일본 히로시마시립대 교수로, 갑신정변 당시 김옥균의 일기로 알려진 ‘갑신일록’이 일본에 의한 위작임을 밝혀낸 사람이다.

일향연구원 홈페이지 게시판에는 강 원장의 글이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올라온다. 그는 얼마 전 ‘세 가지 두려움’이란 제목으로 글을 썼다. 그 두려움이란 “아직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 새싹이 꽃피우기도 전에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것, 두 달가량 소요되는 유럽 답사를 과연 갈 수 있을까 하는 것”이라고 했다.

―아무것도 모른다니, 갑자기 겸손해졌습니다.

“어느 정도 하면 끝날 줄 알았더니 계속 모르는 게 나와요. 내가 지금 알고 있는 게 별것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죠. 그래서 뛰어난 후계자가 나와야 하는데 그런 제자를 키우지 못하면 이 연구가 중도에 끊길 수 있다는 두려움도 있지요. 한 2년 정도 내 강의를 듣고 이 작업을 계승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이 작업을 할 수가 없어요.”

―유럽 답사는 실현되기 어렵습니까.

“비용 문제도 있고 건강 문제도 있고…. 지금 서양에 가서 유물들을 둘러보면 엄청나게 새로운 걸 발견할 거라고 확신해요. 유럽 사람들이 자신의 문화의 가장 중요한 걸 모르고 있거든요. 몇 사람이 같이 가야 하는데 그 비용을 대기가 어려워요.”

―종교를 갖고 있습니까.

“없어요. 그러나 불교를 좋아하죠. 제가 불교 공부를 많이 하고 불교 미술에서 진리를 많이 배웠으니까요.”

―올해 연세가 일흔인데 소감이 있습니까.

“저는 나이하고 관계없어요. 하하하.”

―책을 보면 “나의 퇴임은 죽음뿐이다”라는 구절이 있던데요.

“공연히 하는 말이 아니에요. 그간 살아오면서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았는데 최근에서야 빙산 밑에 있는 것을 알게 된 거예요. 그러니까 은퇴 같은 걸 생각할 틈이 없죠. 하나라도 더 알아내고 전 세계에 이걸 알려야 하니까요.”

―앞으로 중앙박물관장 제의가 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절대 안 해요.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게 어디 있어요. 내가 관장 안 된 것은 이 공부를 하라는 하늘의 뜻이에요.”

―“박지성이나 김연아, 박태환 같은 스포츠스타에게서 배운다”고 말씀해왔는데.

“그런 운동선수들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의 엄청난 노력을 하거든요. 그 젊은이들이 세계를 제패한 것처럼 우리도 문화적으로 세계를 제패할 수 있어요. 그리고 그것을 나도 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어요.”

나이 70이면 ‘노인’이라고 불러도 무례가 되지 않는 나이다. 그러나 강 원장의 눈빛은 말 그대로 초롱초롱 반짝였다. 그 안광(眼光)에 호기심과 장난기가 뒤섞여 있는 느낌을 받았다. 덩달아 그의 얼굴과 손도 나이보다 10년 이상 젊어 보였다. 마지막 질문을 할 차례였다.

중국 문호 왕멍(王蒙)은 평생 배우려는 자세를 견지했다는 뜻으로 노년에 ‘나는 학생이다’란 책을 펴냈습니다. 선생의 삶을 ‘나는 ○○다’라고 표현한다면 무엇입니까.

“나는 문화적 혁명가다, 라고 말하겠습니다. 과거의 모든 것을 혁파하고 새로운 걸 제시하려고 해왔습니다. 지금 내가 공부하고 있는 것이 하나의 혁명적 사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혁명가이고 싶습니다.”

혁명(革命)을 꿈꾼 모든 사람은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출발했다. 그 중 오만한 사람은 실패했고 오유한 사람은 성공했다. 강 원장의 혁명이 어떻게 될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원고를 쓰던 8일 밤 일향연구원 홈페이지에 접속해보니, “수년간의 과제 하나가 오늘 완벽히 풀렸다”는 강 원장의 새 글이 올라와 있었다. 작성시각은 이날 밤 11시 33분이었다.

7일 서울 일향한국미술사연구소에서 강우방 전 경주박물관장이 자신의 연구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
출처 : 방비워(방송비평워크샾)
글쓴이 : modory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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